여행을 다니며 느낀 점 중의 하나는 그 나라를 또는 어느 나라의 관광지를 소개하는 인쇄물들의 인쇄 수준이 거의 그 나라의 경제력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잘 사는 나라 일수록 그 인쇄물이 아름답고 훌륭하다. 근사한 컬러 인쇄물들은 정교하고 화려한 컬러 디자인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필름의 제작과 배열, 종이의 성질, 잉크나 물감의 질, 또 새로운 색을 내기 위한 그 배합, 그리고 인쇄기계의 정교하고 미세한 정밀함을 잘 다룰 줄 알아야만 하는 과정을 거쳐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출판업을 해본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결론적으로 인쇄란 매우 전문적이고 아주 정교한 작업이며, 인쇄물의 수준을 통해서 한 나라의 기술과 경제수준을 재보았던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주 틀린 기준은 아니라는 확신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쇄중의 인쇄, 인쇄의 결정판은 바로 화폐 인쇄이다.

1989년 마닐라에서 아주 정교하게 제작된 100달러짜리 미화 위폐가 발견되었다. 최고의 위폐 감식 전문가들조차도, 기계보다 더 정확하다는 그들의 육안과 촉각테스트로도 이 위폐를 구별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위폐에 ‘슈퍼노트’란 근사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미국은 어느 날 이 훌륭한(?) 지폐의 제작지로 북한을 지목했다. 유일한 증거는 199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만달러 가량의 슈퍼노트를 지니고 있다 체포된 모스크바 주재 북한 상무관이 체포 후, 망명하여 북한 김정일이 슈퍼노트 제작에 관여하고 있다고 말한 증언이었다. 악의 축인 북한은 부인했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슈퍼노트를 비롯하여 고급 지폐 제작에 쓰이는 종이는 일반적인 종이가 아니다. 대략 75%의 면화에 25%의 비단을 섞어서 특별한 기계로 만드는 종이 아닌 종이인데, 슈퍼노트는 진폐의 종이와 성분과 배합이 동일했다. 슈퍼노트 제작에 사용된 잉크도 진짜 달러화에 사용된 잉크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서 황록색으로 또는 흑색으로 빛깔이 달라지는 매우 귀한 변색 염료도 진폐와 똑같은 배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인쇄를 해보면 같은 책이라도 초판 인쇄와 그 후에 찍은 중쇄의 경우, 똑같은 컬러가 나오기가 무척 어렵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100% 똑같은 잉크배합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잉크 자체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고의 기밀사항인 진폐의 잉크배합과 100% 똑같은 위폐란 뭘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잉크와 지폐용 종이, 그리고 지폐용 인쇄기 등은 국제적으로 철저한 통제 하에서만 거래된다. 그래서 위폐전문가들은 일찍부터 북한은 아닐거라고 생각해왔다. 한마디로 말하면 북한은 ‘능력 부족’ 국가라는 뜻이다.

경제가 거덜이난 북한은 자국화폐도 인쇄를 못해 중국에서 해오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북한이 정말 이 정도 수준의 인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찍었던 한민족의 인쇄기술을 지금까지 그렇게 비밀리에 발전시켜왔단 말인가? 천암함 사건 이후 미국은 다시 위폐문제를 제기하며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도대체 언제나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사라질지 요원하기만 하다.